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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예술의 연속/처음 보는 영화

조커 후기 - 당신은 누구에게 공감하고 있나요. (개인적인 해석)

by JENNiNE_your red ruby 201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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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깨나 스포일러 조심!

 

영화는 미화원들의 파업으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하며, 도심 곳곳이 쓰레기가 되었다는 뉴스와 함께 시작된다.

영화의 카메라는 분장하는 조커를 비추지만, 아서의 목소리는 들려주지 않는다.

대신 '환경오염이 심각해져 심지어 고급주택가들도 빈민촌과 다를 바 없어졌다.'고 말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나올 뿐이다.

 

아서의 세상 속 뉴스는 대놓고 차별적이다.

빈민촌에 들끓고 있던 슈퍼쥐는 당연한 일이고, 고급 주택가에 출몰해 빈민촌과 다를 바 없이 만드는 슈퍼쥐는 큰 문제인 듯 떠든다.

더 오랫동안 고질적인 불편함을 겪었을 빈민촌 사람들의 고통은 당연하지만, 이제 막 피해를 입기 시작한 고급 주택가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은 크게 대변해주는 뉴스.

 

심지어 고급 주택가에 사는 사람들이 막 겪기 시작한 불편함은 정치인들에게 슈퍼쥐(=빈민가) 문제를 해결해 줄 실질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웨인금융사의 토마스 웨인은 고담시의 문제들을 해결하겠다며 출마 선언을 한다.

썩을대로 썩어서 슈퍼쥐까지 만들어낸 고담시 사회는 뉴스에서조차 차별이 당연시 되고 있었다.

파업이 왜 시작되었는지는 말해주지 않고 그저 조롱부터 늘어놓을 뿐이다.

 

그리고 그 뉴스를 듣는 빈민층 아서도 그 차별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삐에로 분장을 열심히 할 뿐이다.

차별 받고 있는 입장임에도 분노하지 않고 그저 웃는 입을 그려넣는 아서.

 

 

아서에게는 뉴스를 보며 분노할 시간이 없다.

사회의 문제 상황을 지적하기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감상적인 시간을 갖기엔 현실이 뒤에서 끊임없이 채찍질을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열심히 웃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아 가게에 들여보내는 것뿐.

아서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을 돌보지 않고 애써 웃는 아서에게 돌아오는 건, 사람들의 비웃음과 괴롭힘이다.

 

아서의 삶에는 존중이 없다.

열심히 웃는 아서의 간판을 뺏어가는 양아치들,

구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 총을 건내주더니 마치 아서가 구해달라고 부탁해서 구해준 것처럼 거짓말 치는 동료,

말로는 아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아서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윽박만 지르는 관리자,

해피라고 부르면서도 누가 너를 보며 웃겠냐며 아서의 꿈을 짓밟는 엄마,

단 한번을 아서에게 거짓된 공감조차 해주지 않는 사회복지사까지.

아서는 온 힘을 다해서 웃는데, 영화 속 인물들은 그 누구도 아서를 웃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끝없이 착한 소시민 아서는 늘 희망적인 꿈을 꾼다.

자신이 사람들을 웃게 만들 수 있기를.

어머니를 부양하느라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고단한 인생을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인정 받기를.

한 편으로는 세상 어딘가에 자신의 독특한 유머코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기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자신의 말이 외로운 '외침'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상호간의 '대화'가 되기를.

 

 

하지만 아서가 웃으면 웃을수록 사회는 아서를 거칠게 대한다.

사회는 아서를 끊임없이 무자비하게 괴롭히는데, 아서는 방어구를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물론 어린아이들이 입원한 병원에서까지 총기를 소지한 게 큰 화근이었지만) 아서를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며, 생계수단까지 끊어버린다.

 

결국 분노가 극에 달한 아서는 오랫동안 외면해 온 외로움과 분노를 받아들이고

지하철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얼간이 세 명을 죽인다.

(이 장면에서 주목한 점은 걸음걸이가 이상해서 달리는 폼새도 어색하고,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해서 춤조차 제대로 추지 못하고, 어딘가 부족한 듯 보이던 아서가. 권총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쏘고. 죽지 않은 한 남자가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린 것을 보고 따라 내려서 죽을 때까지 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는 점. = 아서의 환상이 시작되는 장면이거나 아서가 원래는 정상적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

 

빈민층의 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보여주지 않던 뉴스는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남자(아서)의 범죄를 빈민층이 부유층을 향해 저지른 범죄인냥 떠들어댄다.

아서가 그런 일을 벌이기까지의 과정은 알아보지 않고 그저 빈민층의 범죄로 프레임화 시키는 데에 급급한 뉴스.

토마스 웨인은 이 틈을 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다시 한번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힌다.

(뉴스의 언론 플레이 덕분에 제일 큰 득을 본 건 토마스 웨인이다.)

 

빈민층의 범죄로 매도하는 언론의 편향적인 보도는 그 의도와 달리 늘 외면 받던 빈민층을 고무시키고.

토마스 웨인에 의해 '거대 쥐'라고 모욕 당하고 무시 당하던 계층이 목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한다.

'거대 쥐'로 폄하당하던 계층이 정말로 거대해지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영화 속 고담시의 사회는 여전히 거대 쥐가 만들어지는 환경을 바꿀 생각은 안하고 거대 쥐들을 없앨 생각만 한다.

'거대 쥐를 해결할 방법은 거대 고양이(웨인)이다.'라는 농담처럼 말이다.

 

 

다시 아서에게 돌아와서.

아서와 사회와의 간극을 좁혀주고자 존재하는 사회 복지사는 여전히 아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당신은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아서의 지적에 대꾸조차 없이 그저 '시에서 지원해주던 예산이 삭감되었다.'고 말하며 복지 정책 정지를 알리는 복지사.

그리고 그렇게 아서를 위해 사회에서 지원해주던 7종 이상의 약들도 사라진다.

복지사가 아서에게 의무적인 공감이나 예의상의 안타까움이라도 보여줬으면 좋았으려만...

그저 빨리 꺼지라는 식의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사회복지사를 보며 아서는 절망하고 분노한다.

 

 

아서는 자신의 범죄에 고무된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평생을 사람들이 웃을 때 눈치 보며 따라 웃고,

자신의 특별한 웃음코드를 병으로 치부하며 자신의 감정을 부인해 온 아서이다.

(그리고 그렇게 처절하게 웃으며 착한 시민으로 살던 아서가 사회에서 받은 대접은 오로지 무시와 조롱, 핍박, 폭력뿐이었다.)

 

늘 행복과 침묵을 강요받던 아서가 처음으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어 범죄를 저지른 순간,

사회는 아서의 존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존재하는 줄도 모르던 아서의 존재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특정 사회계층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만들어주고,

아서의 우발적 범죄에 대해 언론은 정당하지 않은 정당성(?)내지는 명목까지 부여해줬다.

 

아서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저지른 우발적 범죄에서, 그리고 그 범죄에 열광하는 빈민층에게서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범죄에서 찾아나가기 시작한 아서는, 어머니 페니 플렉의 비밀을 알게 된다.

페니 플렉은 망상증 환자이자 자기애성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의사의 소견서가 담긴 진료기록.

폭력성으로 아동학대를 할 수 있으며, 아이가 묶인 채 발견되었다는 글도 적혀있다.

아서는 다시 한 번 절망하고, 또 분노한다.

 

자신을 해피라고 부르며 웃기를 강요하고,

늘 의미 없는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늘 자신의 꿈을 짓밟으며 근본적으로 무시하면서도,

아들의 금전적인 능력에 기대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착한 아들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혼자 살기도 버거운 세상에서 어머니를 부양하며 살아왔는데.

알고보니 자신의 유일한 혈육라고 생각했던 페니 플렉조차 자신을 학대하던 사회의 일부였던거다.

아서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거지 같은 코미디였다.

 

그렇게 최악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아서에게 어머니 페니 플렉은 또 어김없이 웃기를 강요한다.

결국 아서는 '이게 나예요.' 라고 대답하고는 어머니를 죽인다.

그리고 어머니를 죽인 아서에겐 해방감, 후련함이 감돈다.

 

 

그렇게 페니 플렉을 죽이고 온 아서는 집에서 뒷면에 '웃는 게 예뻐 -T.W'라고 적힌 사진을 발견한다.

누가 봐도 토마스 웨인의 약자임이 분명하지만 그 글을 보고도 큰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아서에게는 진실이 뭔지가 중요하지 않다.

뭐가 뭔지 알 수 있는 상태도 아니지만,

만에 하나 어머니 페니 플렉의 말이 진실이라고 한들 자신은 부정만 당할 게 뻔하니까.

원래처럼 말 안하고 익숙한 무시, 멸시 속에서 사는 게 낫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든 평생을 행복한 적이 없던 아서다.

무엇이 진실인들 그 진실을 삶을 '가취'있게 생각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아서는 불행하고 불쾌한 상황을 숨도 못 쉴 정도로 웃어넘기는 데에 익숙해졌고.

계속되는 불행과 우울함에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지겹다 못해 지친지 꽤 되었다.

사회복지사가 볼 일기장에 대놓고 '나의 죽음이 나의 삶보다 가취있기를-'이라고 쓴 지도 꽤 되었다.

영화 속 아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그 누구도 아서의 신호를 신경쓰지 않았다.

아서는 이미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그에게는 이제 모든 게 다 의미없다.

그저 머레이 쇼에 나가서 어떤 쇼를 선 보일지만 연습한다.

어떻게 등장할지 연습하고 앉는 모습을 연습하는 그는 어딘가 참 어설프고 어색하다.

그리고 짠하다.

소파에 어떤 모습으로 앉을지까지 연습 해가며 보여줄 쇼는 결국 그의 자살이었다.

(아서는 넠넠 이라는 멘트 이후, 자신의 바지춤에 있는 권총으로 자신의 턱을 쏘아 자살할 생각이었다.)

이는 자신의 영상을 내보내며 조롱한 머레이에 대한 복수심이자 평생 자신을 비웃던 사회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조금이나마 더 가치있기를 빌던 그의 염원이 복합된 쇼였으리라.

 

그런 아서의 마음이 어떻든 상관없이 어느새 경찰의 수사망은 점점 좁혀져가고.

머레이쇼에서 선보일 유머를 연습하던 아서의 집에 아서의 옛 동료 둘이 찾아온다.

그렇게 아서의 옛 동료들은 아서가 저지른 범죄를 은근하게 떠보기 시작하고.

전반부와 달리 눈치 빠른 아서는 '네가 말해줘야 말을 맞춰주지.'라며 은근히 자신의 범죄를 떠보는 옛 동료(아서에게 먼저 총을 쥐어주고도 아서가 찾아서 구해준거라고 거짓말 친 동료)를 죽인다.

 

그 후 아서는 숨이 넘어갈 듯 억지로 쥐어짜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웃는다.

그리고 약해서 늘 놀림 받던 난쟁이 동료에게 '너는 늘 나에게 친절했다.'며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어주고 살려 보내준다.

 

아서가 계단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어딘가 참 아프다.

약을 먹을 땐 해괴하다 못해 기괴하던 그의 춤과 발걸음, 움직임이.

약을 끊고 + 어머니 페니 플렉에게 '이게 나예요.'라고 말한 이후부터 매우 자연스럽다.

점점 가벼워지고, 경쾌해지고, 자연스러워진다.

 

약을 끊은 이후 오히려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아서는

아서가 타인에 대한 인식을 버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보면 가장 '아서'답게 살아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죽음을 결심한 이후, 오히려 삶을 즐기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고,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죽음을 결심하고 나니 오랜 시간동안 그를 등 뒤에서 짓누르던 삶의 무게가 사라진듯 가벼워졌으리라.

 

아서는 오로지 머레이쇼에 나가기 위해(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하기 위해) 뛴다.

거리의 양아치들에게 간판을 뺏기고 쫓아갈 때에는 한참을 뒤쳐지던 그가

건장한 경찰을 따돌리며 뛸 때에는 그 전과 달리 꽤나 잘 뛴다.

뒤쫓아온 경찰들을 삐에로 가면을 쓴 사람들이 빚어내는 혼란 속에 넣어놓고는 유유히 빠져나가기까지 한다.

 

 

삐에로 분장을 하면 사회적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프로듀서의 말.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준비한 유머가 있다며 꿋꿋하게 밀고 나간다.

늘 남의 감정을 살피고, 눈치를 보던, 약한 자아를 가진 아서는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하는 아서를 보며 머레이는 이대로 추진하자며 아서를 존중(?)한다.

 

문 밖으로 나서는 머레이에게 아서는 시청자들에게 자신을 조커라고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한다.

머레이는 흔쾌히 알겠다고 하고.

그렇게 아서는 조커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렇게 준비한 자살을 보여주려는 찰나.

머레이는 아서의 영상을 보여줄 때처럼 조커를 조롱하며 다시 한 번 더 사람들의 비웃음을 끌어낸다.

거기서 그치면 좋았으려만, 똑똑한 머레이는 방송에서 아서를 자극하는 멍청함을 보이고.

아서는 결국 조커가 되어, 방송에서 자신의 범죄를 고백한다.

 

머레이는 그런 조커를 거침없이 비판하고, 상대방을 깎아내리며 자신의 도덕성을 자랑하고,

선민의식에 취해 현장에 있는 방청객들의 야유를 유도했으며, 피해자인 척하며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지 말라는 오만까지 떤다.

이 씬에서 머레이는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살인한 전적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의 바른 모습을 방송에 내보내기에 심취해서 상대를 자극하는 얼간이 같아서 우스웠다.

그렇게 비난을 듣던 조커는 자신이 말하려는 순간을 뺏어간 머레이를 쏴 죽이고.

그렇게 조커는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처음 내가 공감한 입장은 당연히 주인공인 아서였다.

아서의 입장에 공감해서 본 조커는 아동폭력의 피해자이자, 사회에 분노를 폭발한 피해자였다.

영화 속에서 아서가 찾아낸 페니 플렉의 진료기록에는 망상증 환자라는 의사의 진단이 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망상증 환자라던 페니 플렉.

이를 뒷밤침하는 진료기록까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 그 어떤 장면에서도 페니 플렉이 약을 먹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아서만 망상증 약을 먹는다.

아서가 약을 먹을 때의 걸음걸이는 이상했고, 움직임은 기괴했으며, 웃음은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도 멈춰지지 않았으며, 이웃집 여자가 여자친구라는 상상을 사실이라고 생각했으며, 어딘가 붕- 떠서 자신의 의견을 타인의 의견처럼 말하고는 했다.

오히려 약을 끊고 난 이후에서야 걸음걸이가 정확해졌고,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으며, 웃음이 절제가 되기 시작했고, 이웃집 여자가 여자친구라는 상상이 자신의 망상이었음을 깨달았으며,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확실하게 주장해나간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망상증 환자 페니 플렉이 어린 아이 아서를 입양해와서는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약물을 대신 먹여서 오히려 멀쩡한 아서를 어릴 때부터 뇌에 문제가 있는 망상증 환자로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페니 플렉이 나쁜 년이라 자신이 먹을 약을 아동인 아서에게 약을 먹이고, 기어이 아서를 뇌에 문제가 있는 아이로 진단 받게 하고, 아서는 그 과정에서 꾸준히 잘못된 오진을 받아온 가정폭력의 피해자였을지도 모르겠다는거다.

(실제로 아서는 7종 이상의 약을 먹고, 계속해서 복용량을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그렇게 아서는 알게 모르게 정서적, 신체적 가정 폭력을 가해 온 페니 플렉을 돌보고 있었음에,

또 자신의 신체적 문제점을 만든 게 보호자라고 믿던 페니 플렉일 수 있음을 접한 후 분노하고 살해를 저지르고.

아무도 자신의 입장을 들어주지 않는 인생이 거지 같다고 생각하며 자살하려던 찰나에 자신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던 쇼에서 주인공이 되는 순간마저 빼앗긴다.

아서의 입장에서 본 머레이라는 캐릭터는 자신을 방청객들 앞에서 비웃고, 자기 같은 삶을 살아보지 않고도 지가 다 아는 냥 건방지게 굴고, 쇼를 중단시킬 수 있음에도 아서를 타고나길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비방하며, 그와 동시에 자신은 타고나길 도덕적인 사람임을 으스대기 위해 쇼를 중단시키지 않은 캐릭터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아서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고 아서를 바라보는 사회의 관점에 공감해서 보면.

아서는 피해 망상증 환자이자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지니었다는 진단을 받은 환자이고.

약이 끊어짐과 동시에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무감각해지는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어머니 페니 플렉의 진료기록 속 진단이 아서를 향한 의사의 진단과 같다는 점에서 그 진료기록은 아서가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배트맨에 나온 조커는 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입이 왜 이런지에 대한 이유를 계속 말한다.

그리고 자아가 끊임없이 분열하듯, 말할 때마다 이유가 다르다.

이 영화 속 아서는 어딘가 일관성이 있는 캐릭터지만.

사회에서 본 조커는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을정도로 기억이 일관되지 않고, 남에게 받은 상처를 말하기 바쁜 찌질한 캐릭터였다.

어쩌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그 또한 사회에서 요구 받는 도덕에서 아예 벗어나지는 못했고, 사회와 그 스스로에게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과정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밀려오는 양심의 가책을 덮어버리기 위해 범죄자인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키기 위해 오로지 자신이 힘들고 상처 받았던 기억만을 간직했거나, 간직을 넘어서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믿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애초에 거대 쥐가 생겨났다는 말도 안되는 환경오염조차도 아서의 망상일 수 있고.

범죄에서 자아를 형성하던 아서가 자신을 빈민층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빈민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인물이라고 상상하며 조커라는 인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머레이는 범죄자의 양심 없는 태도에 분노해 '피해자인 척 하며 범죄를 정당화하지 말라.'라는 맞는 말하다 죽은 비운의 캐릭터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다른 입장(예를 들어 페니 플렉)에 공감해서 보면.

점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망상인지 따지는 그 모든 과정이 의미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마치 무엇이 사실이든 상관없다는 듯 페니 플렉의 사진을 표정없이 쳐다보던 아서처럼 말이다.

 

확실한 건 해석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라는거다.

애초에 타인인 우리는커녕 아서조차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망상인지 알 수 없으니까.

우리가 점차 발전하는 아서의 춤을 한 영혼의 타락해가는 과정으로 해석하든, 조커라는 자아로 거듭나는 과정으로 해석하든, 자살을 결심하고 행복해하는 우울증 환자로 해석하든, 삶의 무게에 질려서 아예 미쳐버린 미친놈으로 해석하든.

그 모든 건 결국 다 무의미하다.

그저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누구의 입장에 더 무게를 싣고, 누구의 감정에 더 공감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DC에 감사하다.

넘쳐나는 히어로물 속에서 우린 히어로의 입장을 너무나도 편파적으로 많이 들어왔다.

밑도 끝도 없는 사고를 치면서도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왕이 된 멍청한 망치신 토르의 성장일기는 아주 잘 보았고.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여자와 돈으로 풀던 아이언맨은 1,2,3까지 주구장창 나왔지만.

정작 우리는 영화 '타노스'를 본 적은 없다.

타노스 한 캐릭터를 죽이기 위해 영화 두 편이 만들어졌다.

두 편만 만들어졌나?

아이언맨과 블랙위도우, 비전을 희생시키다 못해, 타임 패러독스를 일으키는 시공간 이동이 펼쳐지고, 심지어 네뷸라는 한 시공간에서 두 명으로 존재했다.

타노스라는 빌런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캐릭터 몇 명이 희생되고, 시공간의 역설을 만들고, 오류가 많은 시리즈를 두 편이나 제작했는데.

왜 타노스는 기준 없이 그저 생명체 절반을 없애고자 하게 되었는지, 각 행성에서 생명체 절반을 없애고도 그 신념에 대한 흔들림이 없었는지, 왜 입양한 자식들 중 제일 소중한 자식은 가모라였는지, 가모라를 정말 딸로 여기며 사랑한 것인지.

타노스에게 궁금한 점은 무척 많은데 타노스는 시공간이 바뀌어도 그저 처단 당해야하는 빌런이고, 시공간을 바꾸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두 번 죽는 빌런이 되었다.

 

지구를 멸망시키러 온 아스가르드의 신 로키도 마찬가지다.

그가 왜 자신의 모습이 아닌 오딘의 모습을 하면서까지 왕좌에 앉고 싶어하는지, 왜 그렇게까지 위험한 권력욕을 가지게 되었는지, 정말 연애상대가 한 번도 없었는지, 입양해달라고 한 적 없음에도 자신의 종족을 멸망 시킨 오딘에게 강제로 입양 당해서 얼마나 많은 차별을 당하며 자랐는지, 그 과정에서 토르는 어떻게 행동했기에 로키의 반감을 샀는지, 어머니는 얼마나 자애로웠기에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건지.

한번쯤은 이야기 해줘도 될 법한데 팬층 두꺼운 로키의 입장을 보여주는 영화는 따로 나오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이 착한데 바람직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히어로들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장면들은 늘 보여주면서 밑도 끝도 없이 나쁜데 다 그럴만한 사정이 다 있는 빌런들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객들이 수어사이드 스쿼드(제목을 할리퀸과 아이들이라고 지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영화를 관람한 게 아닐까.

왜 할리퀸 분량이 저렇게까지 많아야하고, 할리퀸이 옷 갈아입는 장면이 저렇게 쓸데 없이 길어야하는지에 대해 욕하면서도 기어이 다 본 데에는 빌런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이잖나.(물론 여전히 똥망작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지만)

배트맨의 입장에서 본 고담시와 배트맨의 입장에서 본 조커는 잘 알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조커의 입장에서 본 배트맨과 조커의 입장에서 본 고담시를 본 적은 없었다.

아마 dc는 히어로물이 안 먹히니 빌런물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dc의 변화가 감사하다.

 

밝고 희망찬 세상에서 절대적인 선을 대표하지만 한심한 히어로들을 보고 있노라면...

늘 세상을 밝고 희망차게만 인식하기를 강요 당하는 기분이고, 캐릭터가 인식하는 세계와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전혀 달라서 위화감이 들 뿐더러,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인 선택을 하기만을 강요 당하는 것 같아 가끔은 불편했다.

히어로 영화에서 현실을 찾는 건 웃기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실 세계의 메커니즘은 그렇지 않으니까...ㅎ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보여주기로 결심한 듯 비참한 세상을 보여주고, 그 비참한 현실에서 악착 같이 웃어보려고&하루를 버텨보려고 노력하는 빌런물을 보고 있으니

현실과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고, 내 도덕성도 나쁘지 않구나 싶어 안도감이 든다.

내 주위에 내 언행에 상처 받고, 영향 받는 인물들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니 착하게 살고 싶어진다.

 

DC가 앞으로도 쭉 빌런물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기업가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 하나로 경영권을 물려받은 부잣집 도련님이 조커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 도로, 저 도로 부수고 다니는데도 히어로라고 불리는 이상한 영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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