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음악소리가 시끄러우니 오븐에 들어가서 자라.'는 엄마의 폭언을 듣는 환경.
그리고 그 상황에도 음악을 놓지 못해 오븐에 머리를 들이밀고 자는 한셀.
어린 나이부터 그의 삶은 만만한 게 하나도 없다.
어린이는 몰라서 행복한 것이고 모르기에 순수한 것인데
한셀은 알아서 괴롭고,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을 가졌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엄마의 폭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오븐에 머리를 들이민 채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20대로 자라난 한셀은 미군 남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리고 그 남자와 미국에서 살기 위해.
자신의 타고난 성을 과감히 버리고 제 2차의 성을 갖게 된다.
어머니의 이름인 헤드윅 슈미트에서 헤드윅이라는 이름까지 물려받아 여성으로 태어나는 한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버리는 과감한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헤드윅은 미군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탄생일날 생겨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자신의 삶이 무너져나감을 느낀다.
자기 자신을 버려가며 사랑하던 그가 떠나가고,
자신의 탄생일을 기념해주는(?) 베를린 장벽 또한 무너졌지만.
헤드윅의 삶을 거두어가는 이는 없다.
그렇게 헤드윅은 살아남기 위해 매춘과 알바, 음악을 한다.
그런 와중에 헤드윅에게 새로운 사람이 찾아온다.
미국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흔들리는 자아를 가진 토미.
둘은 함께 음악을 즐기고, 예술에 대하여 말하고, 삶과 사랑을 말한다.
그렇게 깊게 빠져들 것만 같던 둘의 사이는
토미가 헤드윅의 몸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씬을 보는내내 헤드윅이 사람에 대한 갈망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정말 헤드윅이 토미를 사랑했다면 토미에게 이해를 구하는 배려를 하지 않았을까.
사랑은 이해가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헤드윅은 토미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았고.
너무도 쉽고 빠르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 받으려고 했다.
토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음에도 달려들어 안기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헤드윅은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상태이지
토미의 감정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삶에 지치고, 누군가의 사랑이 고프고, 옆에 누구 하나만 있어줬으면 좋겠다 싶을정도로 처절하게 외로운 때에
딱 맞춰서 나타난 게 토미이지 않았을까.
보는내내 헤드윅은 토미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외로움에 굶주려서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착각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둘은 끝이 난다.
라고 쓰면 좋겠지만...!
두려움을 느껴서 도망쳤던 토미가 헤드윅이 쓴 곡들을
자기가 쓴 것 마냥 노래하고 다니면서 대스타가 된다.
구질구질 토미새끼
음악에 대해 1도 모르던 토미를 키워놨더니 감히 배신을...?
그렇게 헤드윅은 배신감과 분노로 토미를 쫓아다닌다.
이 과정에서 성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핍박이 드러난다.
세상은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귀기울여 듣는 이가 없다.
차라리 관심이 없으면 다행이다.
세상은 그들을 보며 거부반응을 너무도 쉽게 보이며 눈쌀을 찌뿌린다.
끝까지 이기적이던 토미는 여러가지 과정을 통해 마침내 헤드윅에게 사과하고.
헤드윅은 그의 정체성과 같던 가발을 쇼어에게 주고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 공연한다.
그리고는 어두운 골목으로 홀로 사라진다.
보는내내 느낀 점은.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 의외의 누군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꿈꾸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 누군가의 욕망이 되기 위해, 누군가처럼 살기 위해 노력 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조차도 자신의 내부 구석 일부 모습을 발달시킨 것일 뿐,
아예 없는 기능을 새로 장착하여 아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는 없다.
애초에 인간이라는 동물이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왜 그 수많은 갈등이 만들어지겠나.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무시해가며 애쓰다보면
'나'라는 존재는 온간데 없이 사라지고, 텅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다.
그 사람이 그만큼 좋고 그 사람이 그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면
영혼까지 쓸려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애쓰고 살면 되지만.
그 사람이 툭 내뱉는 말 한 마디에 바스러지는 자기 자신이 딱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뭔가가 조금 아쉬워지기 시작한다면.
이제는 애쓰지 말아보자.
사랑을 하고 있는데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지친다고 느껴진다면.
노력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도 선택할 기회를 좀 줘보자는 말이다.
두려워도 용기내어 깊은 곳을 내어주어야
상대도 당신을 받아들일지, 그만둘지에 대해 선택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거절 당하는 건 상처지만, 자신을 부정하는 건 감옥이다.
인생에 있어서 힘의 공식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자력을 멈추면 타력이 온다.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써 고치고 외면하고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며 부정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고 멋지다.
진정으로 당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은 자력을 멈출 때에서야 온다.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기갈영화, 퀴어영화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최근 남녀갈등이 심각해지면서 '기갈'이라는 은어를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데.
이 영화에까지 기갈이라는 단어를 갖다붙이는 사람들은 영화를 안 본 것이나 다름 없다.
이 영화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다면 기갈 영화라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울 것이다.
이 영화를 퀴어영화라고 말하는 건 너무도 차별적이다.
영화는 한 인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인생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타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못 받아들여서임을.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한 폭력은 언젠가 남에게도 가하게 됨을.
헤드윅이라는 캐릭터의 삶을 통해 전하고 있다.
영화가 품고있는 메세지를 헤드윅이라는 캐릭터로 보여준다고 해서
퀴어영화라고 하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헤드윅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의 주제는 헤드윅이라는 성소수자의 불행한 삶이 아니다.
타인에게서 외로움을 채우려들지 말고, 타인에게 자신을 강요하지말고.
자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Deny me and be doomed, 나를 부정하면 파멸하리라
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거다.
단순히 성별의 틀로 바라보며 퀴어 영화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한 인간의 외로움, 한 인간의 사랑, 한 인간의 자아실현 등을 더 눈여겨 봐주었으면 좋겠다.
(헤드윅은 영화 속에서 이미 너무도 많은 차별을 겪고 있다.
영화 밖의 관객들만큼은 또 하나의 차별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튼 결론은
★★★자신의 행복추구권을 버려가며, 자신을 희생하며
타인을 사랑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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