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사랑에는 늘 깎임이 따른다.
당장 사회에서도 같이 살자는 명목하에 개인의 깎임(=사회성)을 요구하지만,
1대 다수가 아닌 1대1의 연인관계에서는 더더욱 세밀한 깎임이 필요하다.
적어도 내게 있어 사랑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했고, 노력 없이는 가질 수 없는 게 사랑이었다.
상대를 내 곁에 머무르게 하고 싶다면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비쳐져야만 했고,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깎여야만 했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상대에게 늘 질문을 해야만 했고,
그렇게 결과가 도출되면 내 자신을 그 결과값대로 깎아 나갔다.
상대를 생각하는만큼 상대를 위한 맞춤형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사랑의 방식이었기에 내게 있어 사랑은 희생이었고, 쟁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한 적이 있었는데, 묵묵히 듣던 분이 내게 꼭 보라며 추천해 준 영화가 이 영화였다.
로맨스를 워낙에 싫어하는지라(내 로맨스도 피곤한데 굳이 남의 로맨스 보며 감정노동 하는 일은...;ㅠ)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보게 되었다.
이른 나이에 소설가로 이름은 날렸지만, 대인기피증을 가지고 있는 캘빈.
의사의 조언에 따라 그의 이상형에 대해 타이핑 해나가기 시작한다.
그의 이상형인 루비는 참 자유로운 영혼이다.
처음 마주친 캘빈에게 톡톡 쏘아 붙이며 이야기하고,
본인이 본인 입으로 "나 그림 좀 그린다."며 캘빈이 키우는 개를 그려주는 여자다.
그렇게 캘빈은 매력이 톡톡 튀는 루비에게 점점 빠져들어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라는 진부한 작업 멘트를 날린다.
그런데 원고 속에만 존재할 줄 알았던 루비가 현실에 나타난다.
당황한 캘빈은 자신이 드디어 미친 것 같다며 형인 해리에게 전화하고...
해리는 왠 미친 소리를 하는 동생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된 후, 원고에 적힌 루비를 바꾸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캘빈은 '루비는 이대로도 완벽하다'며 원고를 서랍 속에 넣는다.
그렇게 평생 설레고, 친숙하고, 익숙하기만 하면 좋으려만...
이들에게도 갈등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암컷처럼 오줌 싸는 수컷 강아지, 스카치 덕분에 만난 두 사람)
그렇게...ㅜㅜ 캘빈은 서랍 속 원고를 꺼내어 루비를 수정한다.
루비는 캘빈을 처음부터 사랑했던 것 같다.
캘빈이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것을 보고도 그의 키스를 받아주었고,
캘빈의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하고,
캘빈의 가족들을 만나서 기뻐했고,
캘빈이 이상하다고 말한 새아버지와 어머니를 캘빈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고,
부모님이 이상하다는 캘빈의 말에도 캘빈의 부모님을 흉보지 않았으며,
자신을 혼자 냅둔채 책만 읽는 캘빈의 시간을 존중했다.
고등학교에서 선생님과 연애해 퇴학을 당할 정도로 자유분방하던 루비는 사랑을 뜨겁게 할 줄 아는 여자였고
연애 초반, 캘빈을 위해 스스로를 많이 깎았다.
문제는 캘빈이 루비를 '원래 이런 여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캘빈의 형인 해리가 "여자는 2개월 지나면 바뀐다."고 경고했음에도
캘빈은 해리에게 "나는 루비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라고 한다.
사실 그가 보고 있는 루비는 원래의 루비가 아니라 캘빈을 위해 다듬어진 루비일 가능성이 큰데...ㅠ
깎인 루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의 루비'라고 받아들인 캘빈을 보다보니 답답하면서도 귀여웠다.
(경험이 부족해서 답답하고, 경험이 부족해서 순수(?)하다. 그게 '너드'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사실 캘빈이 저지르는 실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본인의 성격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타인이 본인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거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첫인상의 법칙이라했던가?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짓는데는 3초가 걸리지만 그 첫인상을 바꾸는 데에는 30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첫인상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첫인상의 법칙은 인간관계에서 꽤나 흔하고 강력하다.
그리고 연인관계에서 첫인상으로 인해 생기는 오해와 상상은 유독 로맨틱하고 치명적이다.
본격적으로 캘빈을 욕하게 된 씬은 따로 있었다.
캘빈이 루비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주는 씬.
연애초반, 캘빈은 루비가 요리할 때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자상한 남자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요리는 온전히 루비의 몫이 되었고(캘빈은 소파에 누워서 루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책을 읽는다.)
애써 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 좋게 요리하려는 루비에게 누운채로 '나 책 읽고 있잖아!'라고 짜증을 낸다.
하....
결국 루비는 폭발해서 프라이팬을 싱크대에 던지는데...
루비가 프라이팬을 던지지 않았다면 내가 다 짜증나서 욕을 했을 것 같다.
가만히 있으면 밥 다 차려주는데 그깟 노래 좀 흥얼 거렸다고 눈치주다니...
진짜 밥상 엎는 스킬도 가지가지다.
다른 사람들의 평대로 캘빈은 이기적이었다.
캘빈은 사랑을 지켜나가기 위해 투입해야할 기본적인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캘빈이 하지 않은 노력의 양은 루비에게로 전가되어 루비가 부담해야할 몫이 되었다.
루비는 부담해야할 노력의 몫이 점점 많아지자 캘빈을 향해 불만이 커져만 갔고.
불만이 커져감과 동시에 사랑이 식어갔다.
하지만 캘빈이 루비가 바뀌기를 바래서 이기적이라는 평에는 반만 동의하고 싶다.
(루비와 캘빈, 그리고 루비의 형 해리. 이 때까지만 해도 캘빈은 루비가 식사준비 하는 것을 도와주려고 했다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인 것 같은데
사실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가 어떻게 가능한가...ㅋ
그게 진짜 영화고 판타지다ㅋ
당장 피 섞인 가족조차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지 못해서 바꾸라는 요구를 주고받는 판에
피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 어떻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우리를 낳아 평생 길러주신 부모님조차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지 못해 잔소리를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온 지 모르는 쌩판 남한테 있는 그대로 사랑해달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싶다...ㅋ
삼성 이재용이랑 결혼하기보다 어려운 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주는 사람과 결혼하기일거다.
진심으로 사랑해도 고쳤으면 하는 점은 늘 존재한다!
(가끔은 너무 사랑해서 고쳐줬으면 하는 점들도 생겨난다;;ㅠ)
그런 사랑 하고 있다고 빼애애액- 하는 사람들 많던데 그것도 지금이나 좋지...ㅋ
대부분 길어야 1년이고, 나머지 기간은 노력이다.
지금은 이 사람을 오롯이 사랑하는 것 같아도 시간 지나봐라.
사람은 누구나 결점이 있기 마련이고, 그 결점을 귀여워할 수는 있어도 오롯이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는 힘들다.
하루 온종일 하는 건 롤 밖에 없으면서 정치인들 욕하던 놈, 휴대폰 게임비는 매달 20만원씩 나오면서 화장품 세일할 때 뭉탱이로 사는 거 이해 못하던 놈, 토익시험 한번 쳐본 적도 없으면서 내 토익 점수 무시하던 놈, 지는 6키로 쪘으면서 나 3키로 쪘다고 살 좀 빼라던 놈, 니가 뭘 하겠냐 조용히 시집 와서 집에서 살림이나 해라라며 후려치던 놈 등등.
늦여름 무더위처럼 화르륵 열 오르게 만드는 남친놈들과의 연애를 지속하게 만들어준 건
도 닦는 심정으로 '나나 잘하자.'고 화를 꾹 참아 누르던 내 이성과
'니나 잘하고 그런 말 하세요.'라며 남친을 탈탈 털어버리는 내 입이였다.
그 연애를 지속하게 해준 건 그 남자들의 사랑스러운 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남자들에게 나란 애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결과적으로 둘 중 누구 하나는 깎여야만, 연애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캘빈과 달리 내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고상한 척 그만하자.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더니 지 말 안 들어준다고 '싸패 아니냐'며 주변 사람들에게 욕하는 거 많이 봤고.
말로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고치라고 은근하게 눈치주는 케이스는 한 두번 본 비디오가 아니다.
(이제 그 언행 불일치는 놀랍지도 않다;ㅋ)
영화 속 캘빈 또한 전여친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듯이 말한다.
하지만 전여친과 마주쳤을 때 나온 언쟁을 보면...
음...ㅎㅎ
전여친의 이야기는 하나도 안 듣고 본인의 주장만 하더라.
본인이 해야할 노력을 하지 않고 내 사람만 죽어라 바꾸는 캘빈, 이기적인 거 맞다.
그런데 진짜 이기적인 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며 지 혼자 판타지 찍다가
지 판타지 속 이상형이 아니라며 실망하고 책임감 없이 헤어지자고 하는 것들이다.
(루비가 실존함을 알고 키스하는 씬. 공공장소에서 너무 길더라...;ㅎ)
시대가 100세 시대다.
배우자랑 고작 2~30년 살고 '백년 해로했습니다.'라고 뻥카치는 전래동화 시대가 아니다.
내 사람과 1~3년 판타지 찍다가 헤어질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해?'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바꾸겠다'는 마음가짐을 분명히 가져야한다.
또 그만큼 '이 부분만큼은 고쳐줬으면 좋겠다.'고 분명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사랑을 할 때 늘 웃는 얼굴일 수 없다.
우리는 내 사람을 위해 충분히 깎일 각오를 해야하고,
내 사람에게도 깎일 부분을 명료하게 요구할 줄 알아야만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내 옆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고 노력하자.'라고 마음을 먹는 건 본인 인생에 좋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줘.'라고 내 사람에게 요구하는 건 또 하나의 캘빈 탄생이고, 본인이 불행해지는 지름길이다.
영화가 보여주려고 하는 주제에 속지 말자.
캘빈은 전여친에게 너무 많은 판타지를 강요하다가 차였고.
그 버릇 못 고치고 다음 여친한테도 판타지를 강요한 덕에
루비와 썸부터 다시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만 했다.
마지막 문장을 뭐라고 써야할 지 모르겠는데....
결론은 늘 그렇다시피! ★나나 잘하자★
'인생은 예술의 연속 > 처음 보는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드윅 후기 - 자기 자신을 버려가며 타인을 사랑하지 마세요 (0) | 2018.09.27 |
---|---|
독전 (감독 ver) - 믿음이 있다면 이선생은 누구나 될 수 있다. (0) | 2018.08.29 |
맘마미아2 - 문득 당신의 젊었던 시절이 그리워진다면 (0) | 2018.08.19 |
오션스8 후기 -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나에게 걸스파워를! (0) | 2018.06.25 |
콜미바이유어네임 후기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0) | 2018.03.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