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인 해석 10000%
자나깨나 스포일러 조심
전작은 청소부들의 파업으로 인해 빈민층에만 있던 쥐가 고급 주택가에도 번졌다는 뉴스로 시작되었다.
이 뉴스는 고담 사회가 빈민층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사회가 빈민층에 속한 아서 플렉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사회가 아서를 보는 시각을 미리 엿보게 해주면서 시작했었다.
이번 영화는 아서 플렉과 아서 플렉의 그림자(조커)가 분열하는 카툰과 함께 시작된다.
아서 플렉에게 착 달라붙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림자는
아서 플렉의 모습으로 머레이를 죽이는 범죄를 저지르고는 사라지고.
아서 플렉은 억울하게(?) 경찰에게 맞는 내용의 카툰이었는데
이렇게 이번 영화는 아서 플렉의 입장에서 본 사회를 엿보게 해주면서 시작된다.
수용소에 갖힌 아서는 조커로 불리지 않는다.
그에게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는 기록이 있던 페니 플렉의 성을 따라 플렉이라고 불릴 뿐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수용소에 갖힌 아서에게는 존중이 없다.
조커가 되기 전, 그가 겪었던 사회와 같이 조롱만이 난무할 뿐이다.
2년(영화 속 고담시 배경)이 지났음에도, 고담 사회가 아서 플렉을 평하는 시각은
관객인 우리가 조커를 처음 봤을 때의 혼란 그 자체이다.
그를 빈민 계층에 속한 한 개인,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으로 평하면
I hope my death makes more sense than my life의 sense를 cents라고 쓸 정도로 가방끈도 짧고 지능도 낮지만,
자신을 조롱하며 가정 폭력을 일삼던 어머니에게 금전적 책임을 다 하고 떳떳한 아들로 인정받고자 노력한,
사회에 행복을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지속되는 사회의 폭력에 못 이겨 한 순간에 범죄를 일으킨 '피해자 아서 플렉'이다.
그를 사람 다섯(고담 사회에 밝혀진 바로는)명이나 죽인 범죄자, 조커로 생각하면
무죄라는 판결을 얻어 사형이라는 형을 면하기 위해 해리성 인격 장애를 주장할 정도로 지능적인,
사람을 다섯이나 죽이고도 행한 범죄에 대해 인정하거나 잘못을 늬우치지 않을 정도로 타인에 대한 감정이 결여된,
강한 나르시즘으로 사회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관심을 받기 위한 수단이 살인이었던 '흉악범죄자 조커'다.
모든 계층이 각자 다른 이유로 집중하고 있는 재판.
막상 그 재판의 주인공인 그는 재판에 대해 그닥 큰 관심이 없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지독한 우울감과 고독감, 그리고 지긋지긋한 혼돈.
자신의 삶이 그저 비극인 줄만 알았는데, 뭣 같은 블랙 코미디였음을 깨달았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던 아서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신물나서 대중적인 쇼에서 자살을 준비했던 그가 재판 결과에 대해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본인이 관심없는 재판에 그의 변호사는 그가 해리성 인격장애라는 변호 전략을 내놓았다.
아서 플렉은 사회의 무관심 속, 지속적인 폭력적인 환경에 놓여졌던 아동 폭력 피해자였으며
조커는 그 성장 환경을 이겨내느라 만들어낸 다른 인격체임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변호사는 그에게 '피해자 아서 플렉'이기를 지속적으로 강요했다.
정작 본인인 그는 아서 플렉과 조커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했지만
변호사의 강요에 못 이겨 '피해자 아서 플렉' 연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아서 플렉이지 않기를 바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의 이름은 리.
리는 아서 플렉과 같은 동네, 같은 성장 환경에서 키워졌다며
빠르게 아서 플렉과의 동질감을 형성하고
조커를 사랑한 나머지 일대기를 20번이나 봤다고 한다.
리는 조커를 사랑했다고 조커가 의미있다고 말했지만,
무명 코미디언 아서 플렉이 준비하던 자살 유머를 그대로 재현하고.
리의 이 제스쳐는 둘의 사랑 시발점이 된다.
우리의 모쏠 찐따 아서 플렉은 사랑 앞에 이전과 같다.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전에
혼자 180km 직진하며 커플이 되는 상상을 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녀도 그를 좋아하는 게 맞았다.
둘은 수용소 내에서 영화 데이트를 한다.
또 리가 수용소에 불을 질러 잠깐이지만
둘만의 시간도 가진다.
키스를 굉장히 부드럽게 하는 아서다.
둘만의 시간 이후, 탈출을 계획했다고 오해 받는 아서.
이 일로 독방에 갇히고.
리는 독방에 갇힌 그를 찾아오고 사랑도 나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서는 이게 또 본인의 행복한 망상일까 두려워했다.
이 또한 본인의 망상일까 두려워했지만 그녀가 신문에 실린 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그.
망상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살고 싶어진다.
정말 정말 절실하게 살고 싶어진다.
이제는 그가 상상하는 미래에는 그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제 그의 상상에는 그와 그녀, 둘이 공존하는 미래가 존재한다.
어느새 연인인 리는 그의 재판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변호사의 강력했던 '피해자 아서 플렉' 전략은 다 깨지기 시작하고.
참다 못한 변호사는 그에게 결국 잔인한 진실을 알려준다.
리는 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고, 같은 동네에서 산 적 없고, 이름도 리가 아니라 할리라고.
그녀는 부유한 동네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며, 아버지는 의사라고.
정신과 전공을 한 여자이며 너에게 목적이 있어 다가온 것이라고.
면회에 찾아온 리에게 진실을 묻는 그.
리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사랑받고 싶어서 거짓말 했다고, 그의 일대기에 관련된 영상은 4,5번 밖에 안 봤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렇게 분노하며 리를 떠나려는 그.
리는 다급하게 그에게 아기가 생겼으며, 아서가 살던 그 집을 사서 기다리고 있다고.
미래를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게 "진짜 당신을 보고 싶어"라고 말하며 '조커'가 되기를 강요한다.
우리의 모쏠 찐따 아서는 리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리의 바람에 순응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는 법정에서 변호사를 자른다.
변호사는 이게 상상이 아닌 현실이라고 충고하지만,
이미 그에게 현실은 리이다.
그가 살고 싶어하는 이유도 리이며,
그가 완벽한 수컷으로 비춰져야하는 상대도 리이고,
그가 상상하는 미래에도 리만 있다.
하지만 리는 이상하게 그나 그의 사랑에 도취되어가는 게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자신에게 도취되어가고 있다.
늘 리를 보고있는 아서와 달리 관객을 보는 리.
사람들 모두 그에게 그녀가 과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냐고, 그녀는 거짓말쟁이라고 경고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순수한 우리의 모쏠 찐따 아서는
그녀가 보여주는 것만 믿기로, 그녀에게 속아주기로 작정한 듯 속아넘어간다.
그렇게 그는 리가 강요하는 조커가 되고.
2년 동안 수용소에서 아서 플렉이라고 불리며 무시당하던 그는
2년 전, 그가 저지른 범죄에 열광하는 시민들에 도취된 조커가 된다.
인간 아서 플렉은
부유층에게는 빈민층이 잠재적 범죄자임을 알려주는 존재이며
빈민층에게는 같은 입장에서도 무시하고 싶어지는 찌질한 존재이고
리에게는 착하기만 하고 매력없는 XY 염색체이다.
하지만 조커는
부유층에게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해 다채로워보이는, 어딘가 탐나는 불행을 지닌 존재이자
빈민층에게는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이며
리에게는 "진짜 그"이자 완벽한 수컷이다.
리는 지속적으로 조커가 될 것을 강요하고, 마침내 조커는 그림자 신세에서 벗어난다.
한껏 고무된 조커는 방송되고 있는 재판에서 마음에 안드는 모든 환경을 비판하는 쇼를 진행하고.
판사도 재판을 쇼로 만들지 말라며 멈추라고 몇 번 경고하지만 하지만, 재판을 중지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아서 플렉으로 대하고 있는 아캄 수용소를 욕하는 조커.
그렇게 수용소로 돌아가는 그.
수용소 직원들에게 그는 스스로를 변호하는 변호인도 아니고, 끔찍한 흉악 범죄를 저지른 조커도 아니었다.
재판이 다음날이어도, 성적 학대를 일삼아도 괜찮은 아서 플렉이었다.
아서 플렉을 괴롭히지 말라며 순교자 노래를 부르는 수용자.
수용소 직원 한 명이 수용자를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고.
그는 처음으로 타인으로 인해 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열린 재판.
그는 결국 아서 플렉이 되기로 선택하고, 조커를 부인한다.
그리고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를 사랑한다던 리는 조커를 부인하는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떠났고,
쇼는 안된다면서도 끝끝내 재판을 중지하지 않던 재판장은 불안한 정서를 가진 아서 플렉의 말은 듣지 않았고,
그의 불운한 가정환경에 대해 경청하던 배심원도 어머니를 죽였다는 고백을 듣자 더 이상 듣기를 거부했다.
'흉악 범죄자 조커'를 원하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지만
'피해자 아서 플렉'을 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처음부터 그는 흉악 범죄자 조커나, 피해자 아서 플렉 같이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재판 시작과 동시에 그를 흉악 범죄자 조커냐, 피해자 아서 플렉이냐로 나눠가며 보기 시작했다.
흉악 범죄자 조커 역할을 강요할 때에는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뉘우침 없고 뻔뻔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강력한 범죄자이기를 원했고.
피해자 아서 플렉를 강요할 때에는
죄를 한 번도 저지른 적 없다 못해 어딘가 어리숙한, 머리부터 발 끝까지 깨끗한 순백의 피해자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재판 내내 요구 되는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심적으로 제일 흔들렸던 마지막 재판에서야 그는 진정한 그를 보여주었다.
그는 사회가 강요하는 이분법적 모습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피해자이자 범죄자이고,
선과 악이 혼재되어있으며,
사회를 고무시키는 강인한 면모도 있지만, 사회에 맥없이 끌려가는 약자의 면모도 있음을
가감없이 보여줬다.
그리고 그의 정신병에 감응하는 듯 보였던 배심원들은
진짜 그를 보자 1시간만에 유죄라고 판결 내린다.
그렇게 유죄가 결정되는 순간, 재판소의 벽면이 폭발로 다 깨지고.
재판소 안의 모두가 정신을 잃는다.
하지만 주인공 답게 빠르게 깨어나는 아서.
아서는 정신 차리자마자 법정에서 도망친다.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아서인지, 조커인지 확연히 구분할 수 없는데도
자꾸만 피해자 아서 플렉, 흉악 범죄자 조커를 강요하는 사회에게서 주욱 도망친다.
아서 플렉이 도망치도록 도와주려던 사람도
결국 조커 숭배자, 조커를 강요하는 한 사회일 뿐인다.
달리고 달려 리에게 향하는 아서 플렉.
자신의 최악의 모습조차 사랑해주던 리라고 생각했는데,
리 또한 조커라는 캐릭터를 강요하는 사회 중 하나의 일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아서 플렉.
리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주며 현실과 상관없이 리를 사랑했던 아서 플렉.
아서 플렉이 진짜가 아니라 조커가 진짜라고 믿으며 조커를 사랑했던 리.
두 사람의 상상이 정지되는 순간,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도 모두 정지된다.
그는 다시 수용소로 잡혀가 아서 플렉으로 살아간다.
수용소에서 사형 집행일만 기다리던 아서 플렉.
방문자가 있다는 말에 괜히 들뜬 마음으로 보러간다.
천천히 수용소 직원을 따라나가던 찰나, 아서는 조커 추종자에 의해 칼에 맞고.
아서 플렉은 끝까지 버려지며 영화는 끝난다.
개인적인 후기
조커 1편은 관람하는 내내 누구에게 공감해야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사회 어떤 입장에 공감하느냐에 따라 주인공에 대한 평가는 무궁무진하게 달라졌고.
평가가 달라지다보니 그를 동정해야할지 비난해야할지 응원해야할지 매도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조커 2편 폴리아되는 관람하는 내내 누구를 원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특유의 도파민 뿜뿜으로 오만하다 싶을 정도의 자신감이 보이지만 어딘가 궁금한 흉악 범죄자 조커와
상상 연애만 숱하게 반복하는 모쏠 찐따지만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소프트한 키스를 하는 피해자 아서 플렉.
나는 둘 중 누구를 원했나 생각해보니 조커였다.
틈틈이 아서 플렉의 찌질함과 순수함에 흔들렸지만, 결국 꾸준히 원하는 건 조커였다.
그래서 피해자 아서 플렉을 강요하며 아서 플렉으로 무죄를 받아내려는 변호사가
정의롭다고, 바람직하다고 느끼면서도 어딘가 답답하고 짜증났고.
흉악 범죄자 조커를 강요하며 조커에게 쏟아지는 사회의 관심을 나눠가지는 할리가
래퍼 여친 같은 년이라고, 기생충 같다고 느끼면서도 어딘가 시원하고 좋았다.
흉악 범죄자 조커가 나와 노래할 때 짜증났던 이유는
뮤지컬 영화 특유의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깨지는 몰입감 때문이 아니었다.
1편에서의 무겁고 진중하고 톤다운된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하는 감독한테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피해자 아서 플렉의 이야기에 공감을 못했던 것도, 관심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흉악 범죄자 조커를 피해자 아서 플렉보다 원해서였다.
범죄자 조커 얘기를 좀 더 제대로, 진지하게 듣고 싶은데
가사로 전하는 그 간접적인 전달 방식이 짜증났던 거다.
그리고 이 전달 방식 때문에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영화가 잘못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에서 나오면서야
영화 속 고담시도, 그의 첫 여자친구(?) 리도 피해자 아서 플렉을 원하지 않았지만.
영화관에 앉아있는 관람객들도 피해자 아서 플렉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영화 보는 내내 할리에게 왜 너는 흉악 범죄자 조커를 사랑했느냐고,
왜 다정다감한 피해자 아서 플렉을 사랑하지 못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생각해보니
당장 관객인 나조차 흉악 범죄자 조커를 원했지, 피해자 아서 플렉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캐릭터 참 기구하다.
영화 속의 그는 내내 본인이 아서 플렉인지 조커인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최종 재판에서는 아예 대놓고 그 둘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영화에서 재판이 시작되는 순간, 그가 죄인이냐 피해자냐라는 이분법적 판단을 하게 했고.
그를 보는 고담 사회가 그러하듯, 관객인 나도 조커와 아서 플렉을 따로 구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관객인 나는 조커를 강요할 수 없었지만, 조커를 원하고 있었다.
적다보니 참 이상한 일이다.
최악의 그는 사랑받는데, 최선의 그는 버려진다는 거.
착한 남자는 흰 쌀밥에 김치 반찬, 나쁜 남자는 흰 쌀 밥에 고기 반찬 이런 건가.
분명 음악이 집중을 깬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보는 내내 음악 때문에 몰입감이 깨진다고 욕했는데,
보고 나와보니 영화 밖 관객들을 고담 시민으로 만들어놨더라.
(어디까지나 뇌피셜이지만 한 때 조커에 이입한 빈민층 범죄가 많았다던데
음악으로 몰입감도 깨부셔주고, 범죄자에게 마이크를 오래 쥐어주지 말자는 메시지를 준 건 아닐까 싶다.)
다 이해할 수 있고 다 좋은데
캐릭터랑 이별할 준비는 하게 해줘라...
기구한 캐릭터가 이제 좀 행복해하려나 했더니...
칼을 바로 갖다 꽂냐...
관객이랑 현 조커역 맡은 배우가 작별할 시간 좀 주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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