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을 사랑하다.
타인의 모순을 발견하는 건 참 많은 정신적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다.
누군가의 모순을 발견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 취해야 할 행동이 여러가지가 되기 십상이며
마음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다 못해 흩어지고는 한다.
누군가의 모순을 발견했을 때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느끼는 이유는 위의 2가지 이유가 전부인 것 같지만,
그 사이에 느껴지는 혼란과 여러가지 감정들은 2가지가 아니다.
일관성이 없는 상대는 극도의 혼란, 두려움을 안겨주는 존재이자 불안정성 그 자체일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모순을 보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해온 것 같다.
타인이 보여주는 모습만을 보고, 신뢰하고, 욕망하려고 애썼고 내 눈에 보이는 다른 점들은 애써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급급했다.
알 만한 사람끼리 속아주는 게 예의인 것도 있지만 타인이 감추려고 하는 면들은 보지 않는 게
내가 상대에게서 느낄 혼란 그리고 실망이 덜하다는 것도 한 몫 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알아가면서 모순이 많은 사람이 생겼다.
겉모습은 다 큰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부성애를 자극한다.
(나는 여자이고, 남녀의 평등을 믿지 않는 구닥다리의 고전적인 인간이라 평생 부성애가 뭔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감정은 부성애라는 단어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한없이 고요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한없이 격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아하고 클래식한 외면과 언행을 보여주는데, 그 안에 열정이 있다.
보고 있노라면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가브리엘 향수 광고 그 자체이다.
순결과 무결함을 뜻하는 새하얀 색의 베일로 몸을 감싸고 있는데, 베일이 감추고 있는 몸의 영역이 짧다.
그 차림으로 앞에 있는 장벽을 굉장히 무시무시한 태도로 확 깨뜨리고, 짧디 짧던 그 베일조차 다 벗겨지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순결해보이다 못해 숭고해보이는 것이다.
말이 길어지는데, 요약하자면 상대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 한없이 아름답다는 거다.
왜 나는 상대의 모순이 역겹지 않을까.
왜 모순이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질까.
왜 모순이라는 단어가 즐거울 수 있을까.
왜? 질문에 갇혀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확실한 건 내가 이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즐겁고
이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늘어났으면 좋겠고, 이 사람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거다.
한 사람에게서 모순을 발견하는 순간 바로 독립성과 개인주의를 외치고 심리적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게 나라고 생각했는데,
단순성과 반복성 지겨움에서 안전성을 찾는 게 나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 덕분에 내가 인식하고 있던 '나'라는 개념이 변하고 있다.
변하다라는 말이 이렇게 아름다운 적이 있었나.
변했다라는 말이 변질되었다라는 말이 아닌 적이 있었나.
변하다, 변화 등등의 말들이 이렇게 긍정적인 적이 있었나.
인간이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한 사람을 인생에 들이고 삶의 반경에 들인다는 건 이런 건가 싶다.
나에게 불안정성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내 예측 안에서 행동할 것 같으면서도 예측을 벗어나는 사람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거.
'넌 너고, 난 나야.' 라며 독립과 개인주의를 천수경 독송하듯 반복적으로 외치던 사람을,
'당신에게서 제 과거와 미래를 봅니다. 당신이 곧 저고, 제가 곧 당신 같습니다.' 라고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사람으로 만든다.
찌질해지고, 작아지고, 어딘가 어설퍼지고, 결점과 약점이 많아지는데 그 과정이 즐겁다.
미친 소리가 너무 길어져서 결론을 어떻게 내야할 지 모르겠는데,
이 감정을 또 언제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결론 없이 주절주절 적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없고, 두서없는, 엉망진창인 글을 쓴다는 건 정말 긍정적이다.